

속에서부터 무언가 역류하는 것만 같은 감각에 절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디인지는 몰랐지만 코 끝에 스치는 공기가 묘한 쇠 비린내를 풍기고, 손목도 단단히 붙들려있는 걸 보아하니 필경 납치를 당한 것이리라. 물론 그 납치를 당한 당사자가 뒷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검은 사신 '리본'이라면야,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천천히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려본다.
평소와 똑같은 하루일 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소심하고 멍청한 제자의 업무 상황을 봐주기 위해 친히 시간을 내어 봉고레로 간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의 일이 마무리되어 가면, 접대용 소파에 앉아 봉고레 측에서 제공되는 커피를 마신다. 흔히 구할 수 없는 귀한 커피는 리본의 마음에도 쏙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 부분이 달랐던 것 같다. 늘상 주는 커피가 아닌 다른 커피가 나왔으니까. 커피잔을 들고 들어온 츠나요시에게 '하늘같은 보스가 커피 시중이나 들어서 되겠냐'고 핀잔을 주자 돌아온 대답은 '하늘같은 스승에게니까 괜찮아.'였다. 짐짓 유쾌하게 웃고, 그의 손에 들린 잔을 받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리고?
다음 기억이 없다는 것에 리본은 순간적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방금의 기억대로라면 지금 이 상황은 전부 자신의 제자가 저지른 일이라는 게 아닌가. 설마 커피에 약을 탈 생각을 했을 줄이야. 아니면 주변인과 내기라도 한 것인지. 어떤 이유에서든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다짐하던 리본은 문득, 자신의 앞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는 걸 알았다. 팔을 위로 틀어올린 자세로 앉아있는 자신은 아마 침대 같은 곳 위의 어디쯤일 것이다. 눈은 천 같은 것으로 가려져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는 자신과 조금 먼 거리에 서있다. 아마도 츠나요시일 확률이 높았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랬는지는 묻지 않으마. 그냥 풀어. 지금 풀어주면 적어도 죽이지는 않을테니까."
짜증을 한껏 담고 있는 리본의 말에도 침대맡에 선 인영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입이 달싹이기 시작한 건 리본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즈음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츠나요시였다.
"잘 듣는 약이었나 보네. 자기 상황도 잘 모르는 걸 보면."
"무슨 말이냐."
"하반신에 감각이 없지? 지금 선생님의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잖아."
그 순간 리본은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츠나요시의 말대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하반신에서 애써 신경을 돌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풍기고 있는 쇠 비린내는 아마도 자신의 피 냄새일 것이다. 장난이라기엔 도를 넘었다. 리본은 고요히 분노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지 못하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는다."
"하지 말래도 할 거야."
리본은 자신에게 천천 다가오는 츠나요시를 느끼며 근육을 긴장시켰다. 무력감이 차올랐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적은 없었다.
츠나요시는 단순히 리본의 눈을 가렸던 천을 풀어내리는 것으로 행동을 그쳤다. 잠시 동안 확보되지 않는 시야에 인상을 찌푸리던 리본은 이윽고 보이는 츠나요시의 모습에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 무슨 수작이야, 이건."
"선생님은 기억해? 내가 아직 중학생일 때."
리본의 질문을 묵살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츠나요시는 어딘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울기라도 한 것인지 뺨은 물기로 번들거렸고 눈은 무언가를 쫓는 것처럼 초점이 없었다. 리본은 츠나요시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적, 수련을 끝내고 리본과 함께 씻을 때 종종 보았던 리본의 '운명의 상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내내 츠나요시는 어쩐지 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몸에 쓰여있는 이름을 봐. 전혀 모르는 이름이지? 나도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어.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아."
리본은 거기까지의 말을 듣고 난 후에 급히 자신의 다리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츠나요시가 '허벅지에서 피가 흐른다'라고 말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리본의 몸에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있던 이름이 지워져있었다. 칼로 찢어낸 것만 같은 끔찍한 자상이었다.
"츠나. 너,"
"왜 쿄코의 이름이 새겨져있지 않았을까. 그럼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그녀에게 느꼈던 어린 시절의 사랑으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리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선생님의 운명의 상대는 디노 형이었을까."
"츠나."
"왜 내 운명의 상대가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
"미안해 선생님... 아팠지...?"
미친 것처럼 중얼거리는 츠나요시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리본의 눈이 문득 그의 손으로 향했다. 피딱지가 말라붙어있는 작은 잭나이프. 아마 저것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쑤셨을 것이다. 츠나요시의 말에서 그가 느끼고 있는 절망의 깊이를 어렴풋이 알아챈 리본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줄 수 없는 일이다. 가정교사로서도 처음인 일이다.
"그러니까 선생님... 난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이걸 해결할 수 있을까, 하고."
"... 츠나?"
"선생님은 알고 있어? 운명의 상대를 바꾸는 방법."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암암리에 퍼진 그 방법을 리본이 모를 리가 없었다. 마취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름이 있는 곳의 생살을 칼로 도려낸다. 그 자리에 바로 불이 나 인두 같은 것을 대어지지고, 만들어진 화상 위에 칼로 새 이름을 새긴다. 분명 미친 짓이었지만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매혹적인 말은 수많은 비운의 연인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 많은 연인들이 끝끝내 병원을 찾았다. 보통 살을 지지는 단계에서 거품을 물거나 심하면 쇼크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부위에 따라 달랐지만 여린 살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멈춘 것은 츠나요시가 들고 있던 잭나이프로 자신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였다. 그는 리본과 달리 마취도 하지 않아 보였지만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리본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겨우 참아냈다. 자신의 제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미친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렇게..."
담배도 피우지 않는 츠나요시가 바닥에서 지포라이터를 들어 올렸다. 가벼운 손으로 불을 지핀 츠나요시는 또한 망설임 없이 그 끝을 옆구리에 가져다 대었다. 살 타는 냄새와 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츠나요시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는 것으로 그 고통을 대신했다.
리본은 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또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리본의 시선이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도는 동안 츠나요시는 살을 지지는 행위를 전부 끝내고 지포라이터를 던져 리본이 앉아있는 침대 위로 올렸다. 이번에 츠나요시의 손에 들린 것은 예의 잭나이프였다. 리본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츠나. 이제 그만해. 이런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안 그러면 죽어버릴 것 같아. 내가."
이윽고 츠나요시의 손이 움직였다. 살을 지져 겨우 막혀있던 곳이 칼날이 파고들며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큼지막하게 '리본'을 그린 손이 겨우 멈추었다. 츠나요시는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서부터 흐른 피가 다리를 타고 바닥의 카펫을 적셨다. 이 웅덩이처럼 점점 퍼져가는 붉은 자국을 보던 츠나요시의 눈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리본. 나 아파."
"..."
"미안해 리본. 미안해."
리본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눈으로 침대를 기어올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츠나요시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의 양손에는 지포라이터와 잭나이프가 각각 들려있었다. 자신의 허벅지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상황.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리본의 명석한 두뇌는 충분한 미래를 도출해냈다.
"츠나. 난 결코 널 사랑하게 될 수 없을 거다."
나지막한 리본의 말을 들은 츠나요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을 들은 것만 같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츠나요시는 웃었다.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부드러운 미소였다.
"무슨 소리야 리본. 그런 거 필요 없어."
달칵, 하고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연 츠나요시가 말을 이었다.
"운명 없는 사랑은 실패해도 사랑 없는 운명은 성공할 수 있으니까."
밑에서부터 살 타는 냄새가 올라와 코를 간질인다. 여전히 하반신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 공허한 행위가 자신과 함께 하던 동안 썩어문드러졌을 츠나요시의 마음을 대변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리본은 눈을 감아버렸다. 하염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 츠나요시에게서 잠시나마 도망치기 위해.
written by 누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