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다시 되돌아 갈 수 있을까?
텔레비전 속에는 진부한 로맨스가 펼쳐지고 있다. 착하고 당찬 여자주인공과 잘생긴 재벌 2세인 남자주인공의 사랑이야기다. 중간에 사랑의 방해물인 시어머니와 악녀가 있는 뻔하디뻔한 신파극, 이라고 디노 캬발로네는 생각한다. 주말 연속극인 이 드라마는 이삼십 대의 여성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모양이다. 주위의 여자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늘 다음 이야기를 추리하고는 했다. 무어가 재밌다고.
“이깟 반지 하나 주면 내가 넘어갈 것 같았니?”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대사다. 굵직한 다이아가 박힌 은반지를 남자의 손에 우악스럽게 쥐어주고는 장소를 빠져나간다. 걸음을 따라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이 여자주인공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해 디노는 잠시 머릿속을 뒤집었다. 언젠가 만났던 여자의 뒷모습과 비슷했다. 곧장 텔레비전을 끄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디노는 소파에 누워있고 리모콘은 티비 바로 앞에 있다. 길이를 자랑하는 다리를 아무리 뻗어대도 닿지 않을 거리다. 한참을 낑낑대던 디노는 결국 텔레비전을 끄기를 포기했다. 굳이 전원버튼을 누를 만큼 드라마가 싫은 것은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시켰다. 생산성 없는 시간을 보낼 바에야 밖으로 나가 일을 하라던 집안 방침에 따라 디노는 생산적인 일을 하기위해 소파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지만 딱히 할 짓은 없었다. 삼 주 전에 이사와 짐 정리는 마쳤고 당장에 필요한 생필품들 또한 모두 구매했다. 남은 일이라고는 새로운 직장에 대한 걱정 뿐.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임용고시를 봤다. 덕분에 아버지에게 된통 깨지고 집에서 쫓겨났지만 어쨌거나 임용고시에는 합격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학창시절 디노는 공부에 이렇다 할 관심이 없었고 못하면 못했지 결코 잘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되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에 한 벼락치기가 단번에 성공하다니, 아직 죽지는 않았구나 캬발로네 디노, 하고 으쓱대기도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선생님으로서 처음으로 부임하는 학교가 모교라는 것이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교로 발령이 난 것에 디노는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이 계란한판을 채우고도 두 알이나 남는다는 게 실감 난달까. 서글픔에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무시하고 찬찬히 내일에 대해 생각하는 디노다.
"윽, 미치겠다."
애초에 생각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오는 긴장감에 위가 콕콕 쑤셔와 배를 문지른다. 말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하지? 아이들 앞에서 덜덜 떨면 날 얕보지는 않을까. 학교 안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걱정이 산더미처럼 불어나버렸다.결국 잠을 설쳐버렸다. 디노는 다크써클이 내려온 얼굴로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잘하자, 디노 캬발로네.안타깝게도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넘어지기를 한 번, 교무실을 향해 걸어가다 제 발에 넘어지기를 한 번. 삼십 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벌어진 일에 디노는 눈물을 삼켰다. 불행 중 다행은, 아직 학생들의 등교시간보다는 일러 자신의 추태를 본 사람이 없다는 거다. 디노는 욱신거리는 무릎과 손바닥의 고통을 무시하며 교무실의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혹시 캬발로네씨인가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디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에게 의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제가 디노 카발로네입니다만."
"제가 디노씨 담당자예요. "
자신의 이름을 리에라고 밝힌 여자는 수학선생이었다.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리에는 말이 많았다. 새로운 막내가 나타났다는 것이 기쁜 건지 젊은 남자가 나타나서 기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나는 분명하다. 리에는 디노 캬발로네에게 호감이 있다. 본인의 머리칼과 같은 색으로 물든 볼을 보며 디노는 확신했다.
"캬발로네씨는 1층 교무실로 오실 필요는 없어요. 생활지도부로 배치되셨거든요. 미리 말씀 못 들으셨나요?"
"아, 그렇군요."
정신이 있었어야 말이지. 민망함에 허허 웃는 디노다.
리에와 디노는 걸음을 옮겼다. 생활지도부실로 가기 위함이다. 학생이었을 적에는 생지부하면 무섭기만 했는데, 선생이 되어 생지부에 들어가게 되다니. 그러고 보면 학교 내부도 꽤나 바뀌어있다. 오래된 건물의 티가 나던 내부가 리모델링이라도 했는지 깔끔하게 페인트칠도 되어있고 유리창도 번쩍거린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낡아진 게 아니라 더 좋아졌군.
"책상은 이쪽이에요. 저 창가의 책상은 지도부장 선생님 자리니까 기억해 두세요. 곧 있으면 출근하실 거예요. 제 자리는 건너편이니까 궁금한 점이나 어려운 점이 있다면 바로 질문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확실히 호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해주는 태도가 다르다. 저에게 성심성의껏 대해주는 리에에게 디노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첫 출근인 만큼 정신이 없을 줄은 알았지만 없어도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 출근하는 선생님마다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했다. 어느 과목인지까지 기억하려고 용량적은 뇌 속에 집어넣느라 고생이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디노에게 리에가 종이를 건넨다.
"시간표에요. 제 2외국어 2과목이 캬발로네씨니까, 헷갈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
"네."
"캬발로네씨는 이탈리아사람인데도 일본어를 잘하시네요."
"아 고등학생 때부터 일본에서 살았거든요. 사실 이 학교가 모교예요."
"어머, 정말요? 감회가 새롭겠어요."
"그렇죠. 여러모로 신기해요."
떠드는 사이에 종이 친다. 앗, 하고 디노가 당황하는 모양새를 하자 리에가 웃으며 말한다.
"1교시니까 1학년 c반으로 가시면 되요. 1학년 층은 5층이니까 길 잃지 마시고요."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일이 시작된다. 디노는 울렁거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교과서를 챙겨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실로 들어서자 학생들이 시선이 단번에 쏠린다. 디노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며 교탁 앞에 섰다.
"Ciao."
반 분위기는 새 학기라 그런지 들뜬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자신 또한 들뜨는 기분이 들어 디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따라 여학생들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디노는 눈치 채지 못했다.
"반가워, 내 이름은 디노 캬발로네. 앞으로 제 2외국어인 이탈리아어를 가르칠 거야."
박수소리에 귀가 홧홧하니 달아오른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한 남학생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쌤은 이탈리아 사람인가요?"
"그렇지. "
"와아, 원어민 쌤이 늘었다!"
아이들이 신나 저들끼리 속닥댄다. 그 모습이 귀여워 디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다 또 다시 손을 드는 학생과 눈을 마주쳤다.
새로운 반에 들어갈 때마다 아이들의 반응과 질문은 거기서 거기였다. 여학생들은 눈을 빛냈고 남학생들은 짓궂은 질문들을 해댔다. 여자 친구는 있냐, 일본에는 왜 왔냐, 첫사랑얘기 해 달라. 첫사랑이라는 말에 잠깐 울적해질 뻔 했지만 디노는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학교에 또 다른 원어민 선생님이 있다고. 자신과는 달리 몇 년 전부터 이 학교에 다닌다고 말했다. 나이도 동갑. 디노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 점심시간이 되면 꼭 찾아 만나리라 마음먹었다. 친화력 하나는 최고인 디노 캬발로네다.
점심시간이 되고 디노는 리에에게 들었던 대로 다른 건물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자신이 다닐 적에는 도시락을 싸와야만 했는데, 요즈음에는 기술이 좋아져서인지 급식도 자판기로 고른다. 메뉴도 다양하고. 그러고 보면 아침마다 어떻게 도시락을 쌌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꼭두새벽에 일어나 눈을 반쯤 뜬 채로 밖을 나갔는데 그 때는 그 상태로 요리를 했다는 거니까. 아마 그 녀석과 함께 도시락을 나눠먹고 싶어서였겠지.
"캬발로네씨!"
"아, 리에선생님."
부르는 목소리에 디노는 정신을 차리고 식판을 들었다. 코를 자극하는 카레의 향기에 급 배고파짐을 느껴 디노는 리에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고 했다. 그 옆에 앉아있는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눈에 익었던 은발에 순간 눈을 의심했다.
"스쿠알로?"
디노는 자신을 흘끗 바라보고는 조용히 밥을 먹는 행태에 헛웃음을 짓다 천천히 발을 옮겼다.
"캬발로네씨 이쪽은 영어 선생님이신 스쿠알로 선생님이에요. 두 분 다 이탈리아 분이네요, 그러고 보니까."
"안녕하세요, 디노 캬발로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페르비 스쿠알로입니다."
오전 내내 자신이 떠올리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아찔해짐이 느껴지지만 최대한 동요 없이 반응하리라고 디노는 결심했다.
또 한 명의 원어민이 스쿠알로인 줄 알았더라면 디노는 만나려고 하지 않았을거다. 물론 같은 학교의 선생님이 된 이상 만날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마주치기 싫다고 해서 안 마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첫사랑과 함께 식사라니. 디노는 아까까지만 해도 향긋하던 카레의 향기가 이제는 그렇지 않음을 느꼈다. 체라도 안하면 다행이지. 리에의 조잘댐을 한 귀로 흘리며 디노는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헤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였다. 약 십년을 만난 애인에게. 이유도 듣지 못하고 그저 그만 만나자는 말로 통보받았다. 십년의 시간과 추억이 말하는데 일분도 채 안 되는 다섯 글자로 끝나는 게 퍽 서러워, 디노는 결국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집안은 싸늘했다. 마치 저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 괜시리 짜증이 나 디노는 오른쪽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던져버리곤 쿵쾅 발소리를 내며 방안에 들어간다.
디노는 옛 흔적을 찾아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조리 빈 택배박스에 넣기 시작했다. 침대 구석에 있는 곰 인형, 탁자위의 앨범과 스탠드, 손목에 걸린 손목시계… 물건은 끝도 없이 나왔다. 십년의 증거인걸까. 애초에 물건들을 버림으로서 스쿠알로를 잊는 건 무리, 라고 디노는 생각했다. 이 집에 이사 온 게 6년 전이다. 6년 동안 스쿠알로가 집을 들락날락 거렸고 자고 가는 일도 비일비재 한데,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은 무리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박스에는 계속해서 물건을 담았다. 젓가락부터 속옷까지 없는 게 없었다. 덕분에 집안 살림의 반 이상이 빈자리기 되었다. 디노는 거실의 소파에 걸쳐 누워 어째서 헤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별의 자연스러운 순서를 밟는 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분노, 슬픔, 허탈, 분노, 인정. 디노는 서른 둘 인생에서 볼 장은 다 봤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자신도 적지 않은 이별을 겪어보았고 주위의 사람들이 이별을 겪는 모습 또한 봐왔다. 개중에는 몇 달간 우울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디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담담히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자신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슬프고 화가 나는 건 역시, 내 삶에 네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었다는 말이겠지.
몇 십분 전만해도 애인이었던, 스페르비 스쿠알로와는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금 수저라 불리 우는 디노는 제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캬발로네 재단의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고집을 부려 다른 고교로 진학해버렸다. 반항 아닌 반항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 없었지만 오늘부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아버지의 선택을 따르겠다고 디노는 결심했다. 어쨌거나 입학하고 새로운 반에서 스쿠알로를 만났고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
스쿠알로는 꽤나 유명했다.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걸로도 유명했고 그와 다르게 엄청 똑똑한 걸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호기심이 일었다.
"안녕? 네가 스쿠알로구나?"
"뭐야?"
"난 디노야, 디노 캬발로네. 우리 친구할래?"
"꺼져."
생각해보면 어린 저는 꽤나 당돌했다. 우리 친구할래, 라니. 청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대사가 아닌가. 디노는 팔뚝을 문지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 후로도 디노의 일방적인 밀어붙임이었다. 틈만 나면 스쿠알로에게 달려가 들이댔다. 먹을 것들을 사가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걸었다. 스쿠알로의 반응은 늘 같았지만 어린 디노는 끈질겼다. 그리고 스쿠알로는 넘어가고 말았다. 정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일본 고등학교에서 이탈리아인은 두 사람뿐이었고 차갑게 생긴 스쿠알로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로 작았으니 저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디노를 쉽게 내치지 못함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언제나 내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툴툴대면서도 받아줄건 다 받아주는 스쿠알로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됐다. 친구가 되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디노는 주인 따르는 개 마냥 스쿠알로의 뒤를 졸졸 따랐고 스쿠알로는 틱틱댔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 준달까. 물론 디노만이 느끼는 거였지만.
연애감정을 느낀 건 디노가 먼저였다. 말만 연애감정이지 이제까지 해온 행동들은 연인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두 사람이 깨닫지 못할 뿐이었다. 언제였더라, 그래 갑작스레 스쿠알로가 예뻐 보였다. 자신을 담는 은회색 눈동자가, 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뇌를 강타했다. 그리고 본능이 이성을 뒤덮었고, 정신을 차리니 스쿠알로에게 뽀뽀를 한 뒤였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스쿠알로의 얼굴에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변명을 하던 디노는 시무룩하니 사과했다.
"미안해. 불쾌했지? 원한다면 날 때려도 좋아."
아무리 두 사람이 친했어도 스킨쉽은 잘 하지 않았다. 해봐야 어깨동무정도. 스쿠알로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디노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날 싫어하면 어쩌지? 더럽다고 피하면? 영원히 곁에 있을 수 없게 되는 건가.
"–쾌해."
"응?"
"안 불쾌, 하다고."
"으응?"
놀랍게도 두 사람의 연애는 뽀뽀 한 번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십년의 만남이 상대방의 단 한마디로 끝나버렸지. 첫사랑과 십년을 만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왜 한 사람만 만났을까. 이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조금 더 일찍 헤어졌어도 됐잖아. 십 년의 시간들은 어떻게 된 거야? 스쿠알로와 만난 것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볼을 꼬집어봐도 현실은 꿈이 아니었고 결국 디노는 인정했다. 스쿠알로와는 끝이라고. 디노는 스쿠알로가 받지 않는 전화를 거는 걸 포기했고, 모든 연락수단들을 끊어내었다. 이사도 가고 동창회에는 일절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크게 싸운 줄로만 아는 친구들 또한 디노의 앞에서는 스쿠알로를 입에 담지 않아 디노는 스쿠알로와의 추억 속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처음이군.
"캬발로네씨?"
"네?"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볼을 긁적이며 슬며시 웃는다.
"아니요. 첫 날이라 정신이 좀 없네요."
"수업은 어떠셨어요?"
"아이들이 해맑던데요. 제가 다닐 때랑 똑같아요."
"맞아! 생각해보니 스쿠알로 선생님도 이 학교 출신 아니세요?"
디노는 헛기침을 할 뻔 한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고는 최대한 대화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봐야한다는 느낌으로 스쿠알로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
"어머, 그럼 두 사람 알던 사이 아니에요?"
리에는 드라마라도 보는 것처럼 어머를 연발 외쳤다. 스쿠알로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게 어지간히도 기분이 나쁜가 보다. 나쁜 자식, 지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되려 화내는 거야, 뭐야?
"아니요. 마주친 적은 있을지 몰라도 알던 사이는 아니에요. 학생 수가 워낙 많았어야죠."
"하긴, 그렇기야 하겠네요. 지금도 너무 많아서 저는 아직도 애들 이름도 못 외웠어요."
리에가 말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디노는 여유로운 척 웃음을 지었다. 헤어진 상대에 대한 일종의 자존심 부리기다. 나는 더 이상 너와 얽히고 싶지 않다, 너 같은 건 잊은지 오래니 서로 모른 척하자는 신호.
"전 다음 교시에 수업이 있어서요, 두 분 더 식사하고 오세요. 그럼 이만."
더 이상 있다가는 정말 체라도 하겠다 싶어 빠져나가는 디노다. 첫 출근 날을 첫사랑 때문에 망칠 수야 없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으려 노력하며 식당을 나선다.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저를 태연히 바라보는 표정이 마치 녀석 때문에 울고 아파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원래 차가웠던 놈이지만 그게 자신에게까지 일 줄은 과거의 자신이 알기나 했을까. 상상도 못했겠지. 젠장, 호구같이 가만히 있지 말고 헤어지는 이유라도 물어볼걸.
퇴근은 네 시부터다. 첫날이라 아직 할 업무가 없어 디노는 바로 퇴근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업무가 있었다면 집중을 하지 못해 첫 날부터 야근이라도 할 뻔했다. 디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차로 향했다.
"오랜만이군."
신이시여, 왜 자꾸 저에게 시련을. 디노는 속으로 울상을 지은채로 고개를 돌렸다. 주차한 애마의 바로 옆 차가 스쿠알로의 차였는지 차 문을 열고 서있다. 망할, 되는 일이 없어. 솔직히 말해 스쿠알로의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디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노력한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한 오년 만인가? 싱긋 웃기까지 하니 스쿠알로가 인상을 찌푸린다. 또 뭐가 불만인건지. 솔직히 스쿠알로가 아예 자신을 무시할 줄 알았다. 본인이 이별을 입에 담은 만큼 내가 싫었던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인상을 쓰면서까지 말을 거는 건 또 뭔가.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지만 무시했다.
"할 말이 없다면 먼저 가도될까? 첫 출근이라 피곤하거든."
으레 짓는 미소를 지으며 차문을 열었다가
"왜."
라는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은회색의 눈동자와 마주치니 오년 전 그때로 다시 되돌아가는 느낌이다.
"왜 모르는 사이라고 한 거지?"
"뭐?" 그걸 말이라고 묻는 건가. 디노는 정말 헛웃음을 낼 뻔했다.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힐 이유는 없다. 매우 당연한 일이다. 다른 이들이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자연스러운 순으로 자주 이야기에 오를 테고 붙게 될 테니까. 자신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한 일인데, 왜냐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그래."
뻔뻔스럽기까지 하는 얼굴에 결국 디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건가.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는. 이 정도로 스스로가 상대방에게 취급받을 줄은 몰랐다. 내가, 우리의 십년의 시간이 가벼웠구나. 나는 지금도 이렇게 아픈데. 울음마저 나올 것 같아 디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잘 생각해봐. 왜 인지. 넌 똑똑하니까 잘 알거야."
대답도 듣지 않고 차에 올라타 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도 그 다음 날부터 이주 간 스쿠알로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리에도 자신이 스쿠알로와 서먹한 것을 알았는지 입에 올리지 않았고 덕분에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보람찼다. 학생일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게 되겠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날에는 술을 진탕 마셔 다음 날에 쾡 한 몰골로 출근해 선생님들의 놀란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세상에, 얼굴이 왜 그래요? 술이라도 마셨어요?"
"하하, 첫 출근이라고 친구 녀석들이랑 한 잔 했거든요."
같은 대화들을 하루 종일 반복했다. 아무튼 지금은 이상무라는 얘기다. 자신을 쏘아보는 스쿠알로의 시선만 빼면. 무시하고는 있지만 디노 또한 잘 알고있다. 이렇게 무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앞으로 몇 년은 일할 직장이고 이제 두 사람은 직장 동료다. 몇 년을 무시하면서 지낼 노릇도 아니니 대화를 해보는 수밖에. 한숨을 쉬며 디노는 스쿠알로에게 말을 건냈다.
"스쿠알로씨."
"네."
"오늘 술 한 잔 어때요?"
리에가 따라오려는 걸 기어코 말리고 힘들게 술집까지 왔다. 두 사람이 함께 자주 가던 바였는데, 헤어진 뒤로는 혹시라도 만날까 싶어 한 번도 찾지 않았었다. 다행히도 문을 닫지 않아 디노는 안도감을 느끼며 룸으로 들어갔다. 동성애자들의 대화이니, 남이 들어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체리콕 하나랑… 너는?"
"마니또."
"네, 마니또 한잔주세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니또 사랑은 변함없나보다. 가만히 스쿠알로를 바라보니 스쿠알로 또한 저를 바라본다. 조심스럽게 첫 운을 뗐다.
"오늘 왜 만나자고 한 것 같아?"
"글쎄, 정말 술이나 한잔하자고 만난 건 아닐테고."
"그래,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니까."
손가락 끝으로 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거야?"
"뭐?"
"아닌 척 하지마. 내가 아무리 둔해도 그렇게 쳐다보면 모를 사람은 없어. 할 말 있으면 해. 신경쓰이게 하지 말고."
입을 꾹 닫아버리는 모양새에 디노는 한숨을 쉬었다. 꼭 이런데서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하는 스쿠알로다. 예전부터 그랬다. 꼭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
"왜 사라져 버렸지?"
"뭐?"
"굳이 그렇게까지 갈 필요는 없었잖아. 충분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지금 나랑 장난쳐?"
기어코 큰소리가 나갔다. 하지만 디노는 그것을 바로잡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분노가 한참 위인 상태에서, 체면 차리기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돌아가? 원래대로? 어떻게? 십 년을 만났어. 십 년 동안 연애하고, 사랑했는데. 이유도 듣지 못하고 헤어졌는데 어떻게 다시 되돌아가? 너는 그럴 수 있어?"
턱이 덜덜 떨린다. 디노는 제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래, 딱 이별의 말을 들었던 때와 비슷하다. 그때도 이랬다. 슬프고, 화가 나고,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게 되는. 차라리 무시를 하지. 이미 오년이나 지나서 흔들릴게 뭐가 남아있다고.
"나한테 묻지도 않았잖아. 왜냐고."
"그걸 어떻게 물어봐!"
격양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흐느낌이 함께 섞여진다.
"내가 싫다고 대답할까봐,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까봐.."
기어코 눈물이 흐른다. 디노는 눈물을 북북 닦고는 스쿠알로를 바라보았다. 스쿠알로의 표정은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차오르는 눈물 때문인지, 원채 무표정을 고수하는 스쿠알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더욱 서러워진다.
"됐어, 이제는 정말 끝이니까. 직장에서 아는 척 하지 말자."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빼 거칠게 상 위에 던지고는 몸을 일으켰다.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상에 무릎을 부딪쳤지만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잠깐만."
기다려. 손목을 움켜쥐는 압력에 자리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디노는 입술을 깨물고 스쿠알로를 바라보았다. 꼭 여자가 된 것만 같다. 드라마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할까싶어 결국 고개를 숙여버렸다. 스쿠알로에게 잡힌 이상 힘으로 손목을 빼내지는 못한다. 체격은 비슷해도 힘은 훨씬 웃도는 스쿠알로다.
"왜 연락하지 않았는데?"
"이유도 묻지 못하는 겁쟁이가 어떻게 연락을 해? 차라리 네가 연락을 하지 그랬어, 나쁜 자식."
"연락을 안 해오니까, 당연히 싫어진 줄 알고…"
"그럴 거면 애초에 왜 헤어지자고 한 건데?"
정말 묻고 싶었던 말이 튀어나왔다. 왜 이별을 선고한 것이며, 너는 왜 내게서 마음이 떨어진 걸까. 사실 그 말이 그말이다. 마음이 없어졌으니까 이별을 전한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금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꼭 미련이라도 남은 사람처럼. 아니, 그럴 리 없다. 알고 있는 스페르비 스쿠알로라는 인간은 미련 따위는 없는 인간이다. 설령 미련이라 해도 그것은 미련이지 절대 마음이 아니다.
"지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이해가 안 가는 것 같다. 너 지금 미련 남아서 그러는 것 같아.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비꼼이 가득한 말이다. 자기 자신을 비꼬는 걸까, 스쿠알로를 비꼬는 걸까. 아마 둘 다 일거다. 혹시 내게 미련이라도 남은 건 아닐까하고 가슴이 설레는 제가 바보 같다. 바보 그 이상이지.
"미련 같은 거 아니야."
그럼 그렇지. 디노는 손목을 빼내려 팔을 들었다.
"사랑해."
"뭐?"
"내가 아직도 널, 사랑하나봐."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지나가버린 우리들의 십년의 시간과, 오년의 이별의 시간이 그러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너의 고백을 들은 짧은 시간도 이미 지나가버렸다.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관계는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까?
<고백>
부제: Go Back
written by 꽃숭어리